비행기 타면 두 시간 남짓. 그런데 막상 짐을 싸려고 하면 "이 짧은 시간 동안 뭘 볼 수 있을까?" 싶어 손이 멈춥니다. 저도 처음 타이베이를 갈 때 딱 그랬습니다. 36시간짜리 일정표를 펼쳐놓고, 지우펀도 가고 싶고 시먼딩도 걷고 싶고 101 전망대도 올라가고 싶은데 도무지 동선이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략만 있으면 충분히 됩니다.
지우펀 야경, 낮에 가면 반쪽짜리입니다
타이베이 근교 여행의 핵심 코스를 흔히 예스진지(예류·스펀·진과스·지우펀)라고 부릅니다. 예스진지란 네 지역의 첫 글자를 딴 약칭으로, 타이베이 북동쪽에 위치한 이 코스를 하루에 묶어 도는 투어를 가리킵니다. 지형이 산지와 해안 절벽에 걸쳐 있어 대중교통만으로 소화하기에는 이동 시간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MRT와 버스를 조합해 보려다가 결국 클룩(Klook) 소그룹 투어를 예약했는데, 이 선택이 시간을 꽤 아껴줬습니다.
오전에는 예류지질공원에서 시작합니다. 예류지질공원은 파도와 바람이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낸 기암 지형이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곳입니다. 버섯 모양으로 솟아오른 여왕 바위는 지질학적으로 차별침식(differential erosion)의 결과물인데, 차별침식이란 암석의 단단한 정도가 달라서 무른 부분이 먼저 깎여나가는 현상을 말합니다. 교과서 사진으로 보던 그 모양이 실제로 눈앞에 있으니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스펀에서는 천등(天燈) 날리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천등이란 종이와 철사로 만든 열기구 형태의 등불로, 소원을 적어 하늘에 띄워 보내는 대만의 민속 풍습입니다. 기찻길 위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간격 사이에 천등을 날리는 장면은 사진으로 봐도 인상적이지만 직접 손에 들고 서 있으면 감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스펀 인근에 스펀 폭포까지 들르면 일정이 더 풍성해집니다. 현지에서 닭날개 볶음밥을 꼭 드셔보세요. 뼈를 제거한 날개 속에 볶음밥을 채워 넣은 방식이라 양이 제법 됩니다. 제가 직접 먹어봤는데 한 개로는 아쉬워서 바로 하나 더 시켰습니다.
지우펀은 반드시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에 도착해야 합니다. 붉은 홍등이 하나씩 켜지는 수취로(竪崎路) 계단은 야간에 가장 강렬한 분위기를 냅니다. 수취로란 지우펀 구시가지의 중심 골목으로, 좁은 돌계단 양옆으로 홍등이 줄지어 걸려 있는 대표 포토스팟입니다. 낮에는 그냥 오래된 골목이지만, 밤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저도 여기서 오션뷰 찻집에 잠깐 앉아 바다를 내려다봤는데, 그 15분이 하루 이동 피로를 씻어주더라고요.
타이베이 근교 투어를 계획할 때 참고할 핵심 체크리스트입니다.
- 클룩 등 전문 투어 서비스로 이동 효율 확보
- 스펀에서 천등 날리기 + 닭날개 볶음밥 필수
- 지우펀은 야간 일정 포함 코스 선택
- 스펀 폭포 추가 시 '예스진지포' 코스로 확장 가능

시먼딩과 중산, 어느 쪽이 내 취향입니까
지우펀 야경을 뒤로하고 돌아온 숙소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면, 다음 날 오전부터는 도심 탐색 시간입니다. 이때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게 있습니다. "나는 활기찬 거리 분위기가 좋은가, 아니면 조용한 로컬 감성이 더 맞는가?"
시먼딩(Ximending)은 서울로 치면 홍대와 명동을 합쳐놓은 느낌입니다. 대만 서브컬처(subculture)의 집결지인데, 서브컬처란 주류 문화 바깥에서 특정 세대나 취향 집단이 형성한 독자적인 문화 양식을 가리킵니다. 코스프레 의상을 입고 거리를 걷는 젊은이들, 타이거 슈가 밀크티 매장 앞에 늘어선 줄, 삼미식당의 연어 초밥까지. 제가 직접 걸어봤는데 오감이 쉬지 않는 동네였습니다. 라오제 야시장이나 닝샤 야시장에서 어화젠(굴전)을 드셔보는 것도 권합니다. 어화젠은 굴과 달걀, 전분을 함께 볶은 대만식 굴전으로, 새콤달콤한 소스와 함께 먹으면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습니다.
감성적인 공간을 원하신다면 중산(中山) 구역과 화산1914 창의문화원구 쪽이 맞습니다. 화산1914 창의문화원구는 일제강점기 양조장 건물을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생한 곳입니다. 산업유산 재생(adaptive reuse)이란 기존 건축물의 구조는 살리면서 용도만 바꾸는 도시 재개발 방식을 말하는데, 이 개념이 가장 잘 적용된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산 구역은 서울 경의선 숲길과 비슷한 선형 공원을 따라 편집숍과 카페가 이어지는데, 현지 젊은이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듭니다.
도심을 걷다 보면 발이 먼저 항복을 선언합니다. 일정 사이에 마사지 샵을 넣는 게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다음 코스를 더 잘 즐기기 위한 전략입니다. 댄싱 핑거 같은 곳에서 발 마사지 한 번 받고 나면 나머지 일정이 훨씬 가볍게 느껴집니다. 제 경험상 이건 꼭 일정에 넣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한 가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도심 골목에서 로컬 식당을 찾아 들어갈 때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관광지나 대형 상점은 괜찮은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자(漢字) 기반의 메뉴판만 있는 곳이 많습니다. 미리 번역 앱을 켜두거나 사진으로 주문하는 방식을 익혀두면 훨씬 편합니다.
타이베이 101, 안에서 볼 것이냐 밖에서 볼 것이냐
타이베이 일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은 타이베이 101과 샹산(Elephant Mountain)입니다. 이 두 곳을 어떻게 엮느냐에 따라 같은 비용으로도 훨씬 풍성한 마무리가 됩니다.
타이베이 101은 509미터 높이의 초고층 빌딩으로, 건축 구조적으로는 풍댐퍼(tuned mass damper)를 내부에 설치해 지진과 강풍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풍댐퍼란 건물 상층부에 설치된 거대한 추가 바람이나 지진의 진동을 흡수해 건물의 흔들림을 줄이는 장치입니다. 실제로 89층 전망대에 올라가면 이 황금색 구체를 직접 볼 수 있는데, 공학적으로도 꽤 흥미로운 구조물입니다.
여기서 현명한 동선을 짜는 방법이 있습니다. 101 전망대 내부에서는 도시 전경을 360도로 볼 수 있지만, 정작 101 건물 자체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을이 질 무렵 샹산에 먼저 올라 101 빌딩의 외관과 도심 스카이라인을 담고,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 전망대에 오르거나 빌딩 내 딘타이펑에서 저녁을 즐기는 순서를 권합니다. 딘타이펑의 샤오롱바오(소롱포)는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브랜드지만, 타이완 본점에서 먹는다는 것 자체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한 가지 더, 여행 전에 개별 티켓을 미리 예약해두는 편이 낫습니다. 고궁 박물원과 타이베이 101 전망대는 사전 예약으로 대기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고궁 박물원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성수기에는 현장 입장 대기가 1시간을 넘기도 한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출처: 국립 고궁 박물원). 또한 대만 관광청 자료에 따르면 타이베이는 아시아 주요 도시 가운데 외국인 여행자 안전 지수가 상위권에 속합니다(출처: 대만 관광청). 정치적 긴장감에 대해 뉴스를 접할 때마다 걱정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실제 여행 중에 체감하는 분위기는 그것과 꽤 달랐습니다.
타이베이는 처음 해외여행을 떠나는 분에게도 주저 없이 권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비행 시간이 짧고, 음식이 낯설지 않고, 사람들이 친절합니다. 36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우펀 계단에서 홍등 아래 서 있던 그 순간, 시먼딩 골목에서 손에 밀크티를 들고 걷던 저녁, 샹산에서 101 빌딩 위로 노을이 번지던 풍경은 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짧아도 밀도 있게 설계하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36시간은 어디서 시작되실 예정입니까.